[한국일보]소방차 소리만 들려도 화들짝… 어린 시절 사고에 갇힌 사람들

작성자
한국어린이안전재단
작성일
2015-05-06 11:52
조회
329
소방차 소리만 들려도 화들짝… 어린 시절 사고에 갇힌 사람들

아동 트라우마 치유프로그램 없어
성인 돼서도 후유증에 시달려




“소방차 소리만 들려도 우리 집으로 향하는 건 아닌가 불안해요. 모닥불을 바라보는 것조차 힘듭니다.”

16년 전 경기 화성군 씨랜드 화재에서 간신히 목숨을 건진 김수현(23ㆍ가명)씨는 당시 목격한 이글거리는 불길이 머리 속을 떠나지 않는다고 호소한다. 1999년 6월 30일 사고 당시 7세였던 김씨는 화재가 났던 301호가 아닌 302호에 머물러 운 좋게 살아 남았다. 하지만 그 날 이후 수년 동안 밤마다 집이 불에 타는 형상이 떠올라 두려움에 떨어야 했고, 불이 나면 어디로 빠져 나갈까 하는 생각에 뜬 눈으로 밤을 지새우곤 했다. 시간이 흘러서는 혼자 살아 남았다는 죄책감에 시달렸다. 김씨는 지금도 TV나 영화에서 화재 장면이 나오면 고개를 돌린다.


아동 시절 불의의 사고로 트라우마를 겪은 이들이 성인이 돼서도 신음하고 있다. 사고 트라우마 관리를 제대로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아동은 인지 능력과 표현력이 떨어져 트라우마 발견과 치료가 어렵다. 하지만 어릴 적 겪은 재난 사고 후유증은 평생 갈 수도 있어 대책 마련이 시급하다는 지적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아직 아동을 위한 체계적인 치유 프로그램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아동 트라우마 개념이 도입된 것 자체가 얼마 되지 않았다. 현재 여성가족부는 재난, 성폭력, 사고 등을 당한 가족을 위해 2010년부터 ‘위기가족서비스’를 운영하며 치료비 지원과 상담 등을 해주고 있다. 하지만 아동에 특화된 서비스가 아닌 데다 지원기간도 최대 1년에 그쳐 장기적인 추적 관리가 불가능하다. 아동에 특화된 서비스는 만 13세 미만 아동에게 발생한 성폭력 사건을 여성가족부 해바라기센터가 전담하는 것처럼 아주 특별한 경우에만 이뤄진다. 재난이나 대형사고로 인한 정신적 외상을 관리해주는 기관은 따로 없는 셈이다. 씨랜드 화재 당시 쌍둥이 두 딸을 잃고 어린이안전재단을 세운 고석 대표는 “아동이 겪는 트라우마에 대한 현황이나 제대로 된 통계조차 찾아볼 수 없는 게 현실”이라고 말했다.

아동 트라우마는 피해 아동에 대한 장기 추적 조사와 관리가 필요하다. 하지만 2007년 5월 서울 원묵초등학교에서 소방교육 중 학부모 두 명이 추락사한 현장을 목격한 아이들을 3년 간 연구한 것이 그나마 장기연구 사례로 꼽힐 정도로 아직은 걸음마 단계다. 김선현 대한트라우마협회장은 “트라우마는 성인이 된 후에도 갑자기 나타날 수 있는데 3년 5년 10년 등 생애주기별로 치료하고 추적한 연구가 없어 뒤늦게 고통을 호소하는 경우가 빈번하다”고 말했다.

사회적 관심을 받는 재난이나 대형사고는 그나마 사정이 낫다. 개별적으로 겪는 사고 피해자는 완전히 치료 사각지대에 놓여 있다. 2년 전 학교 정서행동 특성검사에서 이상이 발견돼 정신과 상담을 받았던 고등학교 3학년 최현지(18ㆍ가명)양이 이런 경우에 해당한다. 상담 결과 최양은 초등학교 2학년 때 어머니가 집에 든 강도의 칼에 찔리는 장면을 목격한 뒤로 불안감을 느껴왔던 것으로 조사됐다. 그 전까지는 최양도, 가족도, 주변 사람들도 그 이유를 제대로 알지 못했다.

전문가들은 장기적인 안목에서 아동 트라우마 치료와 연구를 시작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일산백병원 정신의학과 박은진 의사는 “정신건강증진센터나 지역 내 정신상담센터 등이 늘어나면서 과거보다 나아졌지만 학계와 의료계가 사고를 겪은 아동에 대해 꾸준히 관리하고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고 말했다.



정준호기자 junhoj@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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